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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비화 ㉚]삼분폭리 사건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국회 오물투척사건삼분폭리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암적 요소인 밀수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한국비료는 시가 1800만원 상당의 사카린 알을 불법으로 시중에 유포시키다 부산 세관에 적발됐다.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은 19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발단으로 거의 모든 언론사의 취재경쟁에 불을 붙였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성열(金聖悅)은 경향신문 가판 기사를 읽고 “5월 말 진주의 경남일보가 보도한 것이 사실이구나”라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은 5월 말 경남일보가 첫 보도를 했는데 대재벌이 사카린 따위나 밀수한다는 지방지의 보도가 쉽게 믿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중앙지 기자들은 반신반의한 채 사태의 추이만을 지켜보고 있던 중 경향신문 가판 기사가 난 겁니다.”

 

언론은 여론을 격랑(激浪)처럼 출렁거리게 했다. 제6대 국회 제58회 정기국회 회기 중인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국회에서도 ‘특정 재벌 밀수 사건’이란 안건으로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 장기영(張基榮) 경제부총리, 민복기(閔復基) 법무장관, 김정렴(金正濂) 상공장관 등 관계장관이 출석했다. 9월 22일의 발언 순서는 공화당의 이만섭(李萬燮) 의원, 민중당의 김대중(金大中) 의원, 무소속의 김두한(金斗漢) 의원차례였다. 이만섭 의원은 “천인공로할 밀수사건을 국회가 철저하게 파헤쳐야 할 뿐 아니라 이병철 씨를 즉각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두한 의원.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아들이며 해방 이후 반공 투쟁에 앞장섰던 김두한 의원은 다혈질의 열혈남아였다. 그는 군사정권 등장 후엔 야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해 있었다.

 

이날 그는 신문지로 포장하고 노끈으로 묶은 석유통을 들고 일찍 국회에 등원해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낸 이만섭 의원이 김두한 의원 옆에 앉아 있다가 “김 의원, 그게 뭐요?” 하고 묻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응, 이거 사카린이야, 이 의원”하고 대꾸했다.

 

“그래요? 나는 말로만 들었지 사카린은 구경도 못해봤는데 어디 한번 봅시다.”“지금 보면 안 돼. 나중에 보게 될 거요.”

 

앞줄에 앉아 있던 상공부 오원철(吳源哲) 공업국장도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김대중 의원이 삼성재벌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호되게 추궁하고 나자, 김두한 의원이 발언대에 등단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가 기세등등하게 나타나자 본회의장엔 아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김두한이 이날 보여준 것은 ‘말’도 ‘주먹’도 아니었다. 그는 난데없는 웬 들통을 하나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는 질문 아닌 연설을 시작했다. 다음은 국회 속기록에 담긴 내용이다.“…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나는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번 따지고 싶지만, 국무총리가 여기 대통령을 대리하고, 여기 장관이 나와 있으니까 나는 이 사람을 내각으로 보지 않고, 오늘날 삼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하는 것을 합리화시켜버린 하나의 피고로서 오늘 이 시간부터 다루겠습니다(웃음소리).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국민의 사카린 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고루 맛을 보아야 알지….”

 

순간 회의장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정 총리, 장 부총리, 김정렴 장관, 민복기 장관 등의 얼굴과 옷은 순식간에 누런 오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김두한이 전날 밤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퍼 가지고 온 20리터 가량의 똥물을 사건관련 국무위원석에 퍼부어 버린 것이다.

 

유명한 국회 오물투척사건이었다.단상 위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김정렴(金正濂)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그날 김두한 의원을 보니 표정이 좀 이상해요. 본회의장 발언대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하고, 아주 격렬한 연설을 하는데 보니까 ‘저것이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듭디다.”

 

다시 국회 속기록을 보자.“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장내소란). (“산회 선포해요”하는 이 있음).

부의장 이상철(李相喆) : 오늘은 이로써 산회를 선포합니다(오후 1시6분 산회).“

 

이때 오물을 제일 많이 뒤집어 쓴 사람은 김정렴 장관이었다.“뭐가 날아오는데, 날아오는 걸 보니까 똥이야. 순간적으로 이건 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주무장관인 내가 답변도 충분히 못하는 판에 기자들은 연일 사표내라고 아우성이었지요. 그런 판에 저걸 피하면 안 되겠다 싶더군요.

 

나는 떡 앉아서 정통으로 뒤집어썼지. 속죄하는 셈치고. 화장실에 가서 대충 씻고 집으로 가서 옷 다 벗고 몇 번을 물 데워서 씻고, 그래도 냄새가 안 나가요. 한참을 했죠. 그날 오후에정일권 총리에게 사표를 냈어요. 정 총리가 ‘수습을 하고 난 다음 내야지 도중에 내느냐. 나한테 맡겨라’ 하시더니 받고 넘기셔요. 26일 저녁에 해임됐어요.”

 

국회 오물투척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정일권 내각은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다음날 박 대통령은 김두한 의원 사건을 개탄하는 특별 공한을 국회에 보내기도 했다. 국민에게는 속시원한 일로 회자되었지만 김두한 의원은 국회의원의 품위를 지키지 못한 의원이 되어 제명 처분되었다. 김두한 의원 자신도 미련 없이 국회의원 배지를 떼어버렸다.

 

한비밀수사건

한국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오물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또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울산공단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재벌위주 성장정책과 군사정권과의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사건 이듬해인 1967년 울산공단에는 두 개의 거대한 비료공장이 잇따라 준공됐다. 3비인 영남화학과 5비 한국비료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장이 채 완공되기도 전인 1966년 사카린 밀수라는 불미스런 사건이 터졌고, 한국비료 건설을 맡았던 삼성 이병철은 송두리째 국가에 헌납하고 말았다. 파문에 휩쓸린 한국비료 건설과 사카린 밀수에 얽힌 이야기는 계속된다.

 

삼분폭리사건의 후편이 되는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 이 한국비료공장은 어떻게 해서 건설되었는가. 이미 한국에는 제1비료공장인 충주비료와 제2비료공장으로 지칭된 나주 호남비료가 있었다.

 

여기에 1차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3비, 4비(진해비료)및 5비가 태동하게 됐다.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나라에서 비료를 거의 외국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 비료의 자급자족은 정부와 국민의 가장 큰 염원의 하나였다.

 

3비, 4비는 미국의 지원으로 정부가 주도적으로 계획, 추진됐다. AID의 차관을 얻어 미국기업들과의 합작으로, 그리고 미국 기술진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공장들이 완공되더라도 국내 비료수요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며, 특히 그때까지 농민들이 가장 선호하던 질소질 요소비료의 절대부족이라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다. 3비가 질소, 인산, 칼륨의 복합비료공장이었던 탓이다.

 

이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부족한 질소비료공장은 민간기업에서 지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고, 삼성의 이병철이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이렇게 해서 삼성은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요소비료공장인 한국비료를 울산에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공장이 채 완공되기도 전인 1966년 사카린 밀수라는 불미스런 사건이 터졌고, 한국비료는 송두리째 국가에 헌납되고 말았다. 그게 한비밀수사건이었다.

 

한비건설의 주역으로 이병철이 낙점된 것은 그가 1950년대부터 비료공장 건설에 남다른 집념과 놀라운 열정을 보여왔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이 비료공장 건설을 처음 시도한 것은 자유당정권 시절인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말 일본 도쿄의 호텔 방에서 TV를 보던 그는 ‘차관을 얻어 국가적 숙원인 비료공장을 세운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소위 ‘동경구상’이다. 그 자신도 차관이라는 게 있다는 걸 이날 TV대담프로에서 처음 알았던 것이다. 뭔가 해보자는 의욕이 솟았다. 귀국하자 이병철은 이 같은 착상을 송인상(宋仁相) 당시 재무부장관에게 상의했고, 송 장관으로부터 긍정적반응을 얻어내자 자신감이 생겼다. 송 장관은 부흥부장관 시절 AID차관을 들여와 충주비료를 건설한 주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이병철의 계획을 듣고 있던 이승만이 불쑥 물었다.“비료공장을 건설하려면 차관을 얼마나 들여와야 되나”“4000만 달러는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답은 하면서도 이병철은 조마조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러라면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단 1000달러라도 대통령 자신이 직접 결제하던 시절이었다. 일개 기업인이 4000만 달러나 외국에서 꾸어다가 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4000만 달러라….”이승만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이 사장이라면 될 테지.”

이 대통령의 ‘가만(可晩)’ 사인을 받아내자 이기붕 국회의장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워낙 엄청나고 무모한 계획이었다. 이병철 자신도 막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는 차관교섭 대상국으로 미국보다 서독을 먼저 지목했다.

 

골동품 수집관계로 칼 벵거 주한 서독대사와 절친한 사이라는 점에서였다. 이병철은 서독으로 날아가 세계적인 철강. 군수업체인 크루프사의 부사장을 만났다. 칼 대사의 협력 덕분인지 크루프사는 그의 사업계획을 잘 알고 있었고, 반응도 시원스러웠다.

 

“사업계획이 확실하고 은행에서 지급보증만 받으면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달 안에 크루프 측은 차관의 구체적인 약정조건을, 삼성 측은 건설계획서를 각각 보내주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병철은 시 이탈리아의 몬테카니니 재벌을 방문했다. 몬테카니니는 1930년대에 세계 최초의 질소 암모니아 제조공법을 개발한 바 있는데, 그 특허를 처음 사들인 일본인이 해외에선 최초로 지은 공장이 바로 흥남질소비료공장이었다.

 

이런 한국과의 인연 덕택에 몬테카니니사는 한국에서 온 기업인을 환대하였고, 만족할 만한 상담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한 민간기업인의 맹활약으로 무르익던 세계 최대 비료공장의 꿈은 그러나 엉뚱하게도 국내 정치혼란으로 무너질 운명이었다. 이병철이 서독으로 출국하던 때가 1960년 2월, 3·15 부정선거를 앞둔 시점이고 귀국 길에 올랐을 무렵엔 이미 4월 혁명의 횃불이 오른 다음이었다. 이병철은 친자유당 재벌로 거물급 부정축재자로 지목됐고 자연히 차관도입문제는 흐지부지돼 버렸다.

 

민주당정권하에서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처지에서도 그는 다시 한 번 비료공장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건설계획서를 들고 찾아간 주요한 상공부장관은, “부정축재자와는 만나지 않겠다”며 면담을 거절했다. 다행히 김영선 재무부장관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으나, 부정축재 처리문제가 일단락된 뒤 보자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결국 이병철은 비료공장 건설계획을 포기하고 계획서를 반납해 버렸다.

 

그의 비료공장에 대한 집념은 5·16쿠데타 직후 다시 꿈틀거리게 되었다.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단죄하는 대신 경제건설을 위해 기간산업공장을 지어 대신 납부토록 한 소위 ‘투자명령’이 그 계기였다.

 

이병철은 당연히 투자대상으로 비료공장을 택했다. 삼호의 정재호, 조선견직의 김지태와 함께 울산비료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과 맞물린 이 3비는 애초엔 질소비료공장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이 질소에만 편중된 구조적 문제점을 들어 복합비료공장건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굽히지 않고 질소비료만을 고집했다. ‘복합비료 증산은 농경학적 견지에서는 타당하지만 비료=질소라는 인식이 뿌리 깊은 당시로선 시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복비 건설에는 자금이 너무 많이 들고 생산비가 높다, 요소는 동남아 수출전망이 밝지만 복비는 비관적이다, 기술적 어려움이 크다는 등이 삼성 측의 주장이었다.

 

즉, 국가적 차원에서는 복비건설이 옳겠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질소비료를 택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양측의 이견으로 계획자체가 표류하자 미국 유솜은 “요소비료공장만 짓겠다면 앞으로 비료원조를 일체하지 않겠다”고 압력을 가해왔다. 정부 내에서도 균형생산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결국 삼성은 손을 떼고 울산비료주식회사도 해체됐다. 3, 4비사는 복합비료공장으로 정부주도 및 미국의 원조로 건설되었다.

 

당시 이미 이병철은 일본 고베(神戶)제강의 차관을 도입해 외자 5500만 달러, 내자 14억원을 투자하여 연간 30만t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게 백지화되고 투자자금도 고스란히 부정축재환수금조로 영남화학에 환수되고 말았다.

 

세 번째 쓴맛을 맛본 이병철은 이제 비료공장이라면 환멸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와 비료의 악연은 사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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