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유 박사가 설립했다는 이유로 애국·애족기업으로 불리는 유한양행이 뜻밖에도 친일인명사전에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친일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유 박사의 친동생인 유명한 전 유한양행 사장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유 전 사장은 유한양행 부사장 시절이던 1941년 8월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1만원을 일본 제국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내놨다. 친일파의 기준으로 삼는 ‘국방금품 헌납자’에 해당되는 것.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1만원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자’를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다.
또 유 전 사장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15일 유한양행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한 직후인 1941년 12월 27일에 ‘유한 애국기(柳韓 愛國機)’ 1대 제작비 5만3000원을 일본 제국 육군에 갖다 바쳤다. 유한양행 명의 2만7000원, 본인과 만주유한공사 명의로 각각 1만원씩, 유한무역주식회사 명의 5000원, 직원 명의 모금액 1000원을 합친 금액이다.
당시 유한양행은 적성(敵性) 기업으로 찍혀 일제에게 온갖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유 전 사장이 일본군에 비행기 제작비 등을 헌납한 것에 대해 “기업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는다.
실제 일본은 유 박사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와 기업명인 ‘양행(洋行)’을 문제 삼아 유한양행을 미국계 회사로 낙인찍고 핍박을 가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 간부사원 전원을 종로경찰서에 연행하기도 했으며, 5년여에 걸친 혹독한 세무조사로 끊임없이 회사의 목줄을 조였다.
그러나 유 박사가 수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미국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빼앗긴 주권 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독립운동에 매진한 점과 비교하면 동생인 유 전 사장의 친일 행위는 비록 생존을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할지라도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유 전 사장 외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대표적인 기업인은 두산그룹 박승직 창업주, 삼양그룹 김연수 창업주, 화신백화점 박흥식 창업주 등이 있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