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_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詩 감상]
본질적으로 사랑은 시간과 함께 휘발(揮發)한다.
휘발유와 첫사랑의 공통점은 쉬이 휘발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진한 흔적이 남는다.
라이터 없이도 폭발할 수 있었던 불온한 사랑도
한 시절이 지나고 나면 귀 닳은 편지봉투처럼 시
들해지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이 휘발하고 나
면 남는 것은 추억이거나 혹은 불면의 기억일 것
이다.
지금 우리는 먼 길을 떠나는 중이다.
저 모퉁이를 지나노라면 우회로에 몇 개쯤의
휘발성 주유소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추억은 늘 가슴 아픈 법이다
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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