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각(水刻)_오영록
비 그친 오후, 웅덩이
한 뼘도 안 되는 수심으로 하늘이며
뒷산이며 키 큰 가로수가 수직으로 빠졌다
구름이 가면 가는 데로 깎아 담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낮은 몸으로 가장 높은 것을 어르고 있다
높고 낮은 것을 한 뼘 속으로 품어
높아야 한 뼘 낮아야 한 뼘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가만 들여다보니 산수화 한 폭 쳐 놓고
빼놓을 성싶은 못난 나까지 마음을 한번 헹구라는 듯 담고 있다
그것도 한 뼘의 깊이로
높고 낮음에 그 무엇도 자유 없음을 말하듯
화사한 연분홍 벚꽃도
오색찬란한 공작의 날개도
흑백으로 음각하고 있다
詩 감상
높고 낮아야 겨우 한 뼘이다. 한 뼘도 안 되는 높이에 먼저 오르겠다고 그 아우성이다.아무리 인간사가 지배와 복종의 역사라지만 가장 낮은 몸으로 가장 높은 것을 어르는 웅덩이의 그 깊은 뜻만 할 것인가.
높은 산이며, 심지어 화려한 봄꽃마저도 그저 흑백으로 음각하는 웅덩이의 심지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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