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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⑲]개발의 시녀 금융(Ⅱ)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미국 향한 제1진, 미국의 공업단지를 시찰하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제1진은 한국전쟁 때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의 군부와는 일종의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라는 의식을 하고 있던 그는 연고지인 동부지역의 미국 실업인들을 대거 불러 모아 한국 실업인들과의 교섭을 주선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막상 교섭에 들어가자 우리 교섭단은 미국 측의 충고와 훈계만을 들어야 했다. “한국의 공업화를 위해서는 우선 임해지역이나 내륙의 요지에 수송, 전력, 교통, 용수, 노동력, 광활한 용지 등을 갖춘 공업지구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


외자도입법을 합리적으로 제정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맞도록 조성하라.


또 직접투자에는 증권투자와 경영참가, 단일합작 및 유형재산투자, 기술과 노하우 등 다양한 구상을 할 것이며 차관투자로는 직접 차관과 간접차관, 그리고 기술제휴는 기술자 초빙과 파견 훈련, 컨설팅 및 기술훈련소 설치를 고려해야 한다.


이밖에도 차관 상환조건과 금융기관의 지급보증 등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필요하다” 등 얘기들이었다.
역시 금융에 대한 테크닉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나 재벌들은 금융기관의 신용창출로 자금 조달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관치 금융에만 익숙하여 시장경제에는 문외한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의 성숙이란 대목은 한국의 군사정부에 대한 미국 조야(朝野)의 불안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었다.


사실 이 같은 미국 측의 요구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지극히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얘기들이지만, 당시 우리 기업들은 이 정도의 기본인식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생전 처음 듣는 이같은 소리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귀국하는 즉시 그 같은 입지조건을 만들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당신 네가 이러한 조건들을 먼저 만들어 놓은 후 우리에게 연락을 해주면 한국을 방문하여 입지 조건을 실지 답사하겠다”고 했다.


교섭단은 도대체 공업단지라는 게 어떻게 생긴 것인가 한번 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피츠버그(Pittsburgh)와 미시간주 남동부에 있는 디트로이트(Detroit)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16일 보고회를 갖고 신년 초순 해운대호텔에서 박정희 의장 등 군사정권요 인들에게 울산공단 건설을 건의했다.


미국기업인들, 한국 초청으로 울산 찾다
그런데 왜 울산(蔚山)이었을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해서는 구구하다. 당시 울산 개발계획 본부장을 지냈던 안경모 씨는 이렇게 말했다.


“울산이 입지로 선정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경제인들의 건의 때문이었다고 본다. 1962년 정초에 박 의장을 비롯한 혁명주체들이 해운대호텔에 묵고 있을 때 경제인들을 그쪽으로 불렀고, 그 자리에서 경제인들은 울산을 입지로 건의했다. 입지조건은 국내 어느 후보지역보다 좋았다. 항만시설을 하기 편리하고 태화강의 수원 확보가 용이한 데다 기후는 온난하고 수륙을 통한 교통망이 좋은 곳이다. 절대적 요건이라 할 수 있는 이용가능 토지가 광활한 데다 염가 매입이 가능했다.”


1월 10일 이병철 씨가 박 의장 앞으로 보낸 건의서에도 “공업 지리상 울산읍 일대가 신공업도시 건설에 적합하다. 공장부지의 확보나 항만의 천연조건, 철도시설의 정비, 공업용수의 공급면에 있어서 매우 유리하다”고 적시하고 있다.


울산은 이미 일제시대 때인 1940년대에 조선축항주식회사에서 공업도시 건설을 위한 계획을 추진한 바 있었다. 이것이 경제인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게 안 씨의 분석이었다.


그렇다면 군사정부는 왜 그토록 쉽게 결론을 내렸는가.
여기에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피해를 받지 않았던 부산과 경남 동남부밖에 없었던 뼈저린 군인들의 기억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항간에는 제3공화국의 실력자 이후락(李厚洛)의 출신지가 울산이라는 점에서, 그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으나, 공단건설 당시 이후락은 그만한 권력자가 못되었다.


3월 19일 이병철 경제인협회 회장은 미국 실업인들에게 모든 입지조건 준비와 공단을 마련했으니 곧 와달라는 전문을 보냈다. 미국인들은 너무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이어서 한참을 지체하다가, 마침내 5월 11일 밴 플리트를 단장으로 28명의 실업인단이 김포공항에 내렸다.


그들은 입국 즉시 박정희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을 예방하고 경제기획원에서 한국경제의 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미국기업인들은 겉으로는 공업단지 건설계획의 채산성 등을 따졌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높은 인플레와 함께 정권의 민정이양 등 정치일정에 민감해했다고 한다. 바로 다음 날 이들 일행은 울산현지로 시찰 길에 나섰다.


당시 울산엔 보리밭의 보리포기들만 바람결에 출렁이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능성(可能性)을 볼 줄 알았다. 동해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서 항만조건에 안심하고, 넓은 구릉지를 보고 입지조건이 괜찮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울산, ‘태화강의 기적’이라 할만하다
1962년 2월 3일 경남 울산군 대현면 고사리, 동해의 푸른 파도가 굽어 보이는 편편한 언덕에서는 거창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내각수반 송요찬과 최고회의 각 분과위원장 전원, 각료전원, 군 고급장성들, 주한미국 대사 버거 등 주한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이 날 행사는 마치 서울의 모든 기관이 이 벽지어촌으로 옮겨온 듯했다. 얼마 전까지 국민적 관심을 끌면서 단죄의 대상이 됐던 부정축재 재벌총수 이병철 등 주요 재계인사들이 주빈 격으로 나타나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이 행사를 위해 장생포와 울산 사이의 낡은 기찻길에는 쉴 새 없이 임시열차가 들락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및 기타 연관산업을 건설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울산군의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의 두왕리, 범서면의 무거리, 다운리 및 농소면의 화봉리를 울산공업지구로 설정함을 이에 선언 한다.” 이러한 박정희 의장의 선언으로 역사적인 울산공단 건설은 첫 삽을 뜨게 됐다.
그의 연설은 계속된다.


“4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는 신라의 융성을 재현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민족중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는 것이니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 나가는 그 날엔 국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울산공업도시의 재건이야말로 혁명정부의 총력을 다할 상징적 웅도이며, 그 성패는 민족빈부의 판가름이 될 것이니 온 국민은 새로운 각성과 분발, 그리고 협동으로써 이 세기적 과업의 성공적 완수를 위하여 분기 노력해 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독일 루르(Ruhr)의 기적을 뛰어넘는 태화강(太和江)의 기적을 만들겠다는 의욕과 낭만적 열정 속에 울산은 변하기 시작했다.


공업 한국의 상징 울산, 지금은 포항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대도시화됐지만, 불과 30여 년 전 만해도 고깃배만 한가로이 오가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상전벽해(桑 田碧海)라는 단어가 딱 어울릴 듯한 울산의 오늘은 한마디로 ‘태화강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박정희 의장, 통화개혁을 단행하다
현대 산업사회의 비판자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은 제도화된 물질과정으로서의 생산, 즉 산업을 사업과 대비시키고 산업은 점점 사업에 대해 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되며, 혁신을 위해 노력한 이전의 대기업가, 즉 산업의 총수는 기업의 금융 총수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고 했다.


사업과 산업이 괴리되고 산업이 사업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인식은 자본주의 문명의 비판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인식 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폐기를 주장했고, 케인즈는 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 개입을 주장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가능했던 것은 쿠데타 정권이 이러한 약점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개발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이다. 이러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가지 요소를 결합시켜야 한다. 당시 값싼 임금의 노동력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토지 수용, 그리고 무차별 자본재도입 외에 재벌의 능력을 총칼로 징발했다.


여기서 금융의 역할을 주목해야한다. 경제개발 요소 중에 가장 취약한 부문은 내 외자 자본조달. 이를 군소리 없이 해낸 것이 금융기관과 금융인이다. 지금 구조조정이라는 미명아래 금융인의 노고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안타깝게도….


산업자금화한다면 구악일소와 경제개발이라는 두 가지 혁명공약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단순한 발상이 화폐개혁인 것이다.


6월 9일 오후.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이 발표된 지 5개월 후,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는 집에서 모처럼 토요일 오후를 한가히 즐기고 있었다. 곧 닥칠 풍파도 숨을 죽인 듯 나른한 오후였다. 갑자기 요란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느닷없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만찬에 초대했다는 호출이었다.


황급히 장충동 의장공관으로 달려간 민 총재에게 정문에 있던 연락장교는 “의장께서 지금 최고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전해주었다. 그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회의실 주변은 삼엄한 경계가 펴져 있고 영문도 모른 채 몰려온 기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까지 무슨 일이 있는지 까맣게 몰랐던 민 총재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통화개혁?’ 그가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에는 벌써 최고의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 의장이 자리를 잡자 곧 재정경제분과위원 류원식(柳原植) 장군이 일어섰다. 그가 꺼낸 것은 역시 통화개혁에 대한 제안 설명이 아닌가!


민 총재는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이 통화개혁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미 수뇌부에서 결정한 엄청난 사안에 이의란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실무 뒤치다꺼리치곤 너무나 막중한 책무만 주어졌을 따름이었다.


일국의 중앙은행 총재가 다음 날 0시를 기해 시행될 통화 개혁을 전날 저녁 발표직전에 처음 듣게 되었다니. 이것이 1962년 통화개혁의 성격과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삼성 이병철 씨를 비롯한 기업인들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불려갔다.


“어젯밤 뉴스 들었지요.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조달에는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행한 것입니다. 워낙 극비리에 진행했기 때문에 최고회의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박 의장은 이렇게 말문을 꺼내며 의견을 물었다.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통화개혁이 잘못된 구상이라고 주장했다.


큰 경제혼란을 초래할 것이고, 신화폐교환을 위해 날마다 수백 만명이 은행창구에 줄을 서야 하고 그 원성은 모두 정부로 쏟아질 것이다. 거액의 현금을 장롱에 쌓아놓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등등….


박 의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조치는 이미 철회될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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