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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㊱]편타대출과 화신산업(Ⅲ)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흥한화섬(주)에 닥친 첫 번째 난관은 당국의 외국차관에 대한 지급보증허가가 예상 밖으로 지체된 일이었다. 인견사 생산시설 도입에 대한 허가신청을 낸 것이 1962년 12월 20일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원료화학공장과 발전시설 차관에 대한 지급보증을 발급 받은 것이 무려 1년 11개월이 지난 1964년 11월의 일이었다.

 

당초 화신산업(주)은 차관도입에 소요되는 기간을 3개월로 잡았다. 차관도입업무에 백지상태와 같았던 당국의 실무진은 한편으로 공부를 해가며 추진할 수밖에 없어서 이처럼 시간의 차질을 가져왔던 것이다.

 

두 번째 난관은 내자(內資)의 잘못된 책정이었다. 처음 당국의 내자책정은 8억 4000만원인데, 기술진의 정산 결과는 6억원이 늘어난 14억원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차액은 인견사공장에 대한 양측의 견해차에서 빚어진 것이다. 당국에서는 펄프에서 인견사를 뽑아내는 비스코스 원액공장, 방사공장, 후처리공장 등 주공장의 건설만을 계상한 것이지만, 흥한화섬(주) 기술진에서는 인견사 제조용 주요약품은 국내공급이 어렵고, 이류화탄소(二硫化炭素) 같은 약품은 위험방지를 위해서도 자가제조가 불가피하며, 연중무휴 잠시의 정전(停電)도 불허하는 제조공정으로 보아 자가발전시설을 비롯하여 앞의 부속공장들의 건설비까지를 계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자증액은 당국에서도 그 이유를 타당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증대된 내자가 지급보증이 지체되는 동안에 물가 폭등으로 다시 천문학적인 숫자로 치솟아 착공한지 불과 2개월 후인 1964년 8월에는 벌써 25억원을 돌파했고, 끝내는 건설자금 35억원, 운영자금 5억원 총계 40억원을 넘어서게 되어 내자조달에 치명타를 주었다.

 

화신산업(주)이 흥한화섬(주)의 인견사공장 건설을 위하여 도입한 외자의 총액은 미국에서 550만 달러, 독일에서 500여 만 달러이었다. 그런데 이 양국의 차관이 각각 그 거치기간을 끝내고 제1차 원리금상환에 들어간 것은 미국의 경우 1964년 2월부터였고, 독일은 같은 해 12월부터였다.

 

당초계획은 공장건설 기간을 넉넉잡아 2년이면 족하리라고 보고, 차관기간을 2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했던 것인데 지급 보증이 의외로 지연되는 통에 공장도 세우기 전에 상환부터 해야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1964년 2월이라면 이제 겨우 당국의 지급보증을 얻었을 즈음이었고, 12월은 산업은행에서 약속한 융자가 여의치 못해 조흥은행으로부터 편타대출을 받았을 무렵이었다. 내자조달도 어려운 상황에 차관금의 원리금상환이 밀어닥쳤으니 가뜩이나 쪼들리는 자금난은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당국에서는 반액융자를 약속한 바도 있고, 당국의 양곡수급계획에 협력도 할 겸 보리 5만 톤을 연불수입하여 그 대금을 우선 건설자금에 전용해도 좋다고 허가해 주었다.

 

화신산업(주)은 이러한 허가를 받고 1964년 5월 중에 우선 보리 2만 톤을 도입키로 하였다. 그런데 5월 3일자로 한미환율이 130:1에서 255:1로 껑충 뛰어 외환부채는 갑절로 늘어난 반면에, 국회 재경위원회에서는 화신산업(주)의 보리 도입이 부당한 특혜라고 논란이 일어났다.

 

국내 식량난을 해결하려던 보리 도입이 이처럼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당국에서는 도입 보리를 전량 동결조치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1964년 6월 27일 흥한화섬(주)은 기공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인 공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로부터 약 2개월 후 박흥식 사장은 장기영 부총리를 만나 공장 건설 진척 상황과 악화된 자금사정을 설명하고 반액융자의 조속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반액융자는 어렵고 10억원만을 같은 해 9월부터 12까지 4개월에 걸쳐 매월 1억원씩 융자하고, 나머지 6억원은 이듬해인 1965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분할 융자해 주겠다고 재차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도 그대로 실현을 못보고 그 해 12월에 가서야 산업은행으로부터 겨우 7000만원이 나왔을 뿐이었다. 여기서 임시 타개책으로 강구된 것이 편타대출이었다.

 

건설자금 조달은커녕 보리쌀·시멘트 도입으로 빚더미

당시 고흥문(高興文) 위원의 장기영 부총리에 대한 질의를 들어보자.

 

“…특히 장 부총리는 화신산업을 비롯한 특정재벌에 대하여 20억원의 막대한 한도외 자금을 방출하도록 확약한 사실이 있고 또 제1차 단계로 조흥은행으로 하여금 ‘비스코스’ 인견사공장 건설자금조로 불법적인 편타취급을 강요해서 3억 5000만원에 달하는 시설자금을 방출케 했고, 제2차 단계로 산업은행 업무계획에도 책정되어 있지 않은 자금을 화신산업에 대하여 대출하도록 압력을 가해 융자시켰습니다 … 재무부장관도 아니고 한은 총재도 아닌 장 부총리가 은행장을 호출해서 편타취급으로 화신산업에 특혜융자를 하도록 공공연한 위법행위를 방법과 절차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으니 장 부총리가 차라리 조흥은행장에 적합하지 않을까 본위원은 이렇게 생각합니다.(폭소)”

 

물론 질의한 내용처럼 장 부총리가 그렇게 월권을 자행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국회에서 특정재벌에 대한 금융특혜라고 논란을 벌이게 되어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당국마저도 지원태도가 경화되어 당초 예정했던 1965년내 공장완공계획은 완전히 중단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화신산업(주)에서는 구종로서대지 1,400평과 신문로사옥마저 헐값에 방매하여 공장건설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준비 없는 경제개발계획! 기간산업을 일으켜보려는 갸륵한 기업인들의 전력투구는 눈물겹다. 그래도 이처럼 난항을 거듭한 끝에 흥한화섬(주) 인견사공장을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착공 2년 6개월만에… 그런데 이 무렵인 1966년 봄 갑자기 국내에 시멘트 파동이 일어났다. 당국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화신산업(주)이 제안한 일본으로부터 시멘트 12만 톤과 철근 1만 2000톤의 연불 수입을 허가하고, 일본으로부터 시멘트를 도입해 오면 전량 관수용(官需用)으로 매수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박흥식 사장은 당국의 뜻에 따라 일본 관계 요로와 교섭을 벌여 시멘트와 철근을 2년 연불조건으로 도입하였다. 화신산업(주)에서 시멘트를 대량 도입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감추어 두었던 시멘트가 쏟아져 나와 시멘트 값이 하루아침에 폭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당국에서도 약속한 시멘트 매수에 난색을 표하게 되어 결국, 화신산업(주)은 건설자금의 조달은커녕 보리쌀에 이어 시멘트 도입으로 더욱 무거운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설립한 흥한화섬, 시련의 전조는 드리워지고

드디어 1966년 12월 15일 인견사 공장이 준공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陶農洞). 대지면적 약 16만평, 건축면적은 4층 건물의 본공장을 비롯해 연 건평 3만여평 연산(年産) 5400톤 규모의 비스코스 인견사를 생산하는 본공장 등을 외자 1500만 달러, 내자 41억원, 총계 약 2600여만 달러를 투입해 완성한 것이다.

 

인견사 생산시설은 일본 동양(東洋)레이온에서 슬러리 (Slurry)식 일식(一式)을 내놓은 것이 있었다. 가격은 중고품으로 550만 달러. 당시 같은 규모의 신품을 미국에서는 1750만 달러, 이태리에서는 2750만 달러까지 호가하고 있어서 550만 달러라면 여간 싼값이 아니라는 자체평가였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평가는 설립 당시 일본기계수출업자의 사기매각으로 부실한 중고품장치를 들여다가 가동하였다는 것이다. 마치 모파상의 단편소설 ‘진주목걸이’가 연상된다. 박흥식 사장이 일생을 던져서 번 돈을 사기설비매입에 모두 털어 넣었다니. 역시 정보에 어두워 당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쨌든 웅장한 흥한화섬(주) 공장의 완공은 1962년 회사설립으로부터는 만 4년 6개월만의 일이요, 공장 기공식으로부터는 2년 6개월만의 일이었다. 이 날의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삼부요인과 내외귀빈 그리고 2000여 종업원들과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준공식에 이어 감격 어린 시운전과 함께 본격적인 생산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써 지금까지 수입에만 의존하던 인견사를 완전 자급자족하고 나아가 세계 시장에 도전하여 귀중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흥한화섬(주)의 시련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때로부터 더욱 가열화하였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 모른다.

 

그것은 우선 인견사의 수요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과거와는 달리 국내생산이 이루어진 마당에 당연히 수입정책을 바꾸어 관세와 수급내용 등을 조정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산 타섬유에 비해 당국의 보호육성책이 전무한 형편이었다는 점이었다.

 

나이론사나 아크릴사 등의 합섬사(合纖絲)는 가트(GATT)의 자유품목으로 책정하여 관세율도 60%의 고율로 한데 반해 인견사만은 종전의 관세율로 고정시켰고, 기별 수입공고에서도 나이론사와 아크릴사는 수입링크품목으로 제한조치를 가하면서도 인견사는 자동수입품목으로 방치하므로 고전을 면할 길이 없었다.

 

당시 인견사의 국내가격은 국제가격의 78% 정도에 불과하여 인견사의 주생산국인 이태리나 일본의 자국내 가격이 L/B 당 206원선인데 비하여 우리의 경우는 155원선에서도 처분을 못하는 형편이었다.

 

어쨌든 국내 판매가 저조해지자 믿을 것은 대외수출 뿐이었다. 준공 당시만 하여도 인견사의 수출은 홍콩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장을 상대로 연간 200만 달러선은 무난할 것으로 전망하였었다.

 

총판이었던 화신산업(주)에서는 이를 근거로 하여 1968년도에는 연간 300만 달러의 수출목표를 수립하고 인견직물의 중심교역지인 홍콩에 사무소를 설치하는 한편, 동경사무소도 인견사수출위주로 체제를 개편하여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여의치 못했다. 현실과 괴리된 환율과 기대했던 홍콩의 상황(商況)이 월남전의 종전과 함께 극도로 위축되어 목표의 1/3에 불과한 실적밖에 올리지 못했다. 겹치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소유한 모든 부동산을 시가(市價) 이하로 처분하고자 내놓았으나 이것도 원매자가 좀처럼 나서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최종 방안으로 산업은행 차관대지급금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장기차관 500만 달러의 도입만이라도 허가해 줄 것을 재삼 당국에 신청하였으나, 이 역시 정부의 외환정책상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 무렵 동시에 제출된 다른 회사의 차관도입 신청서 7건 중 화신산업의 것만은 불승인되어 좌절되었다.

 

이 정도가 되면 아무리 반백년의 경험과 남다른 경륜을 가졌다 치더라도 이처럼 모든 대세가 외면하는 마당에서야 박흥식인들 어쩔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전후를 재삼 가린 후에 흥한화섬(주)의 주식 50.003%를 산업은행에 귀속시키고 운영권을 일단 산업은행에 맡기고 만 것이다.

 

그것은 1968년 10월 15일, 흥한화섬(주) 도농공장 준공으로부터 불과 1년 10개월만의 일이었다. 이 뼈아픈 계약이 체결될 때 그는 향후 5년 내에 환매권을 갖는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었다.

 

흥환화섬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산업은행으로 넘어가

결국 그 때로부터 만 1년만인 1969년 10월 15일 마침내 막대한 내·외자를 투입한 흥한화섬(주)이 산업은행 소유로 넘어갔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일이 이렇게 안 풀려서야 ! 산업은행의 관리기업체였던 인견사공장은 그 후 어찌되었는가.

 

(주)원진레이온이란 이름으로 300여명의 직업병환자를 배출한 채, 1993년 6월 공장폐쇄 결정이 내려지고 같은 해 11월 30일 345억원의 자본잠식되는 등 결손이 누적되어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1994년 7월 6일 노동부장관, 산업은행 총재 등이 참여하는 산업정책심의회에서 서면결의로 공장부지를 주택용지로 변경하는 결정을 내린다.

 

역시 인견사공장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흥한화섬으로 막대한 재산만 투여한 박흥식 사장은 심기일전하여 복합기업으로 탈바꿈하려고 여러 방면에서 시도하였다. 1970년 원자력발전기 제1호기를, 1974년 원자력발전기 제2호기도입계약을 성사시켰고, 1972년 화신전기(주), 1973년 화신소니(주), 화신·레운나의 합작, 화신타이거리싱(주) 합작 설립하는 등 사업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소니사와 합작한 화신산업이 부도를 내면서 경제활동을 끝낸다. 그의 아성인 화신백화점, 신신연쇄가(新 新連鎖街)도 1977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발표한 종로지구도 로확장계획에 따라 일부가 헐리게 되었음이 밝혀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오늘날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서울종로타워빌딩이 세워졌다. 건너편 신신연쇄가 자리에는 제일은행 본점이 우뚝 서 있다. 자그마한 키에, 당당한 체구, 날카로운 눈빛이 지금도 살아 있어 상업 자본가로서 불굴의 의지만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그는 1988년 85세로 타계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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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강인중 영앤진 회계법인 대표 “新 가치창출 리더로 거듭날 것”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지난해 11월 회계개혁법의 시행으로 4대 회계법인이 독차지하던 회계시장에 파문이 일고 있다. 정부는 규모와 자격을 갖춰야 상장사 감사를 맡기겠다고 발표하면서 중소형 회계법인들이 하나 둘 뭉치고 있다. ‘컨설팅’의 영앤진 회계법인과 감사전문 신정회계법인도 지난 6월 1일 통합을 통해 한가족이 됐다. 강인중 영앤진 대표는 내실 있는 조직화, 책임 있는 리더십, 합의된 의사결정을 통해 영앤진 회계법인이 새로운 가치창출의 리더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회계개혁법 시행 후 대형화는 필수적인 생존전략 중 하나가 됐다. 이합집산을 통해 규모를 키웠다고 끝이 아니다. 운영을 잘못한다면, 대우조선 등 대형 회계분식사건이 되풀이되지 말란 법이 없다. 강인중 영앤진 회계법인 대표는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과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회계업무는 고도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필요한 업무입니다. 개인의 역량을 제한하는 조직화는 단순히 모여 있는 것이지 조직화가 아닙니다.” 영앤진 회계법인은 위원회와 체계만 있고, 실제로는 대표와 소수 이사진이 밀실정치로 결정하는 허울뿐인 체계화를 철저히 거부한다. 개인의 역량은 보장하지만, 고정영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