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업은행 인수과정도 의혹의 베일에 싸여 있다. 설경동, 윤석준, 정재호 등 내로라하는 재계실력자들을 포함한 18명이 몰린 입찰에서 이병철(李秉哲)씨는 3위로 응찰했으나 최고 입찰자를 제치고 낙찰돼 36만3,500주를 매수하여 지분 83%로 지배권을 완전 장악했다. 그가 써낸 가격은 주당 2,866환으로 1위인 주당 4,400환, 2위인 3,300환 보다 후순위여서 당연히 최고입찰자에게 낙찰돼야 마땅했던 것이다. 다만 1, 2위 응찰자의 주수가 50주, 100주에 불과한 것이 빌미가 됐다. “1위와 2위 응찰자는 다른 응찰자에 대한 짓궂은 행동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주(株)가 분산되면 금융시장의 정비를 기할 수 없으므로 묶어서 불하하려는 것이 정부의 의도인 것 같았다. 입찰가격 제2위인 주당 3,300환으로 사주기 바란다는 정부의 요청이 있어 낙찰에서 빠진 잔여 주까지 합해서 그 가격으로 사들이게 되었다. 총액 11억9,000만환 상당의 규모였다” 이병철(李秉哲)씨의 주장이었다. 또, “은행주 대량 매각방침에 따라 실력 있는 기업인이 불하를 받아야 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변이다. “대주주입장을 이용하여 임의로 금융기관을 운영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1950년 은행법 제정 이후 가장 긴급한 금융재정상의 과제는 은행 귀속주를 민간에 불하하여 금융의 민주화와 은행의 건전화라는 법정신 구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1954년 7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당 정해영 의원의 질의내용 “시중은행의 불하문제는 벌써 2~3년 전부터 논의되고 있는 문제인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알고자 합니다. 총리의 시정연설에도 이 문제를 적극추진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정부로서는 언제까지 실시할 것인가.” 정부의 ‘귀속주 불하요강’ 발표 이에 따라 정부는 1954년 10월 14일 ‘귀속주 불하요강’을 발표했는데 관재청, 재무부 및 한국은행으로 구성된 불하추진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이다. 불하원칙은 연고와 우선권을 일체 배제한 공개경쟁매각, 독점방지를 위하여 불하단위 주식을 일정한 회수로 분할응찰하고, 불하대금의 일시지급, 불하주 낙찰가격은 정부사정가격 이상으로 하며, 2년간 명의개서를 금지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정부사정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입찰할 수 있는 횟수와 주식양도방식이 까다로워 입찰희망자가 거의 없었다. 1955년 3월 17일 국회 본회의 김도연(金度演) 의원의 질의. “반년이 넘는
실제로 은행법 실시를 강력히 반대해 온것은 재무부였다. 재무부는 귀속주 때문에 일반은행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기득권자였다. 은행법 실시는 이 모든 지배권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시행 반대 전열에 재무부가 앞장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미 한국은행법 제109조에 따라 재무부의 모든 감독권한이 한국은행으로 이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무부는 은행법 시행을 지체시킴으로써 지휘감독권을 여전히 누리고 있었다. 은행법 표류는 일제하의 은행령이 해방 후 10년째까지 일반은행에 적용되었다. 반면 한국은행법과의 중복규정은 사실상 한국은행법의 적용을 받았다. 이처럼 법적용과 감독체계의 이원화와 중앙은행 통화신용정책이 효과적 지원을 받지 못하여 금융질서는 적지 않은 혼란과 문제점을 빚어냈고, 건전한 금융활동을 저해하였다. 취약한 은행경영은 더욱 궁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관치금융의 짙은 그림자였다. 따라서 일단 은행법의 전면적 시행을 단행하고 과도기에는 단서조항 등을 활용하는 한편, 점차 귀속주불하, 증자, 자산재평가를 실시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 선두는 역시 금융통화위원회로 귀속주 불하와 증자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한편 은행법 실시를 강력히 촉구했다. 이
정부가 11월 23일 강만수(姜萬洙) 재경원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협의단을 구성, 협상전략을 숙의할 무렵 IMF 실무협의단 1진이 서울에 입성했다. IMF의 준비는 완벽했다. 11월 24일 오전 10시 첫 상견례 장소에서 협상의 이상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우석(金宇錫) 재경원국장은 “IMF의 지원목적이 한국경제를 얼마나 신속하게 정상화시키느냐에 있는 만큼 협상에 큰 이견이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본진이 도착하는 26일 이후 이르면 열흘 이내에 협상이 마무리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달랐다. 협상분 위기와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협상 결과를 너무 빨리 읽고 있었다. 22일 주가가 15.64포인트 떨어질 때만 해도 IMF 후광이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24일, 10년 4 개월만에 최저치인 441.02로 마감됐다. ‘IMF주가’는 이후 단 하루도 상승하지 못한 채 협상이 타결된 12월 3일 339.31로 내려앉았다. 환율은 달러당 1,200원대를 돌파했고, 가용외환보유 고는 6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IMF가 지원에 나서면 외환시장이 빠르게 안정될 것으로 국민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 지원을 기 대했던 일본과 미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20분 임창렬 부총리가 IMF구제금융 지원을 공식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로부터 IMF의 관리체제에 우리나라 경제를 맡기게 되었다. IMF의 요구조건은 크게 거시경제의 긴축운용, 금융·자본시장을 비롯한 대외개방 확대, 금융개혁 및 부실금융기관정리, 대기업집단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네 가지로 대별된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IMF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그리고 1997년 12월 5일 우리 정부와 IMF가 최종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발생원인을 돌아보자. ① 국내기업들은 1990년대 들어 뱅크론 도입이 점증하고 주식시장이 개방되고 나아가 해외채권발행이 허용됨에 따라 외화차입을 크게 늘리었다. ② 대외교역조건의 악화로 인한 경기침체도 경제위기의 주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③ 금융시스템의 취약도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인으로 지적된다. ④ 금융에 대한 부당한 외부간섭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주요인의 하나이다. ⑤ 외환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다. IMF의 금융지원 조건은 ① 거시경제의 긴축운용이다. GDP성장률을 1998년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공적자금 규모는 얼마나 될까 2001년 9월 공적자금 백서가 발표되기 전에는 재경부와 금감원, 그리고 예보공사는 공적자금규모가 64조 원이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규모가 부풀어졌다.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에서 발표한 공적자금보고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공적자금 백서’를 통해 입증된 공적자금 규모가 국민이 알고 있던 64조 원이 아니라, 공공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 몰래 동원한 자금까지 포함 109조6,000억 원을 사용하였다는 충격적 사실이 나타났다. 정부 발표 공적자금투입액 109조6,000억 원은 2001년도 정부예산 100조 원보다 많을 뿐만 아니라, 1999년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483조 원의 23%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최근의 공적자금 잔액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보면 된다. 2002년 3월 31일 현재 공적자금은 156조2,000억 원이다. 4,700만 명의 국민 1인당 332만 원이 되고, 가구당 1,085만 원씩 우발채무를 보증 서주고 있다. 한나라당 이한구(李漢久) 의원은 숨겨진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