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백석이 되어_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타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張勃*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장발(1901~2001) : 서양화가.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냈으며, 대표작으로는 김대건 신부상, 명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_이생진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 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시인] 이 생 진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196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으로 『그리운 바다 城山浦』 『거문도』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반 고흐, ‘너도 미쳐라’』 『산에 오는 이유』 『어머니의 숨비소리』 『오름에서 만난 제주』 『섬 사람들』 등 다수 1996년 윤동주 문학상